Beyondary
민주화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화적 재생
Description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쓰러진 곳이다. 1987년 1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 군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하였고,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하여 국민의 공분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적인 반독재, 반인권 운동의 상징적 현장이 되었다.
당시 정부는 남산, 대방동, 남영동 등 많은 고문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 김근태 국회의원 등 많은 민주 인사들은 남산과 남영동 시설을 끔찍한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개방되지 않는 시설이라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2005년 경찰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개편 계획을 발표하고, 이후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되었다. 4층 박종철기념전시실 및 5층 조사실 등 일부 시설이 개방되었지만, 시설의 전모가 시민사회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었다. 지난해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드는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제 이곳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이관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Software Used
SketchUp 2019, Vray 4.2, Photoshop CC 2019, AutoC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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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으로 상징되는 건축은 어떤 형태로 남아 있어야 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할까?
남영동 대공분실은 공권력을 통해 국가 폭력의 직접적인 형태로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인권 유린이 자행된 공간으로 실제로 그곳에서 고문이나 조사를 받았던 개인들에 대한 존중이나 위로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국가 폭력의 피해자는 단순히 남영동 대공분실을 들어갔다 나온 사람만이 아니다. 유신 체제의 선포나 긴급조치, 계엄, 위수령 등과 같이 반독재 저항 행위를 통제 하고자 했던 ‘제도적인’ 형태의 피해자인 과거 국민들과 또한 국민적 저항을 받고 정당성이 취약한 독재정권 아래에서가 아닌 절차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민주’ 정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일 수도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과거의 그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은 아니지만 다른 형태의 보안 분실은 현재에도 운영 중이며 우리는 앞으로 지어질 민주 인권 기념관을 통해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즉 남영동 대공분실은 과거 독재 정부의 국가 폭력을 상징하며 동시에 과거에 자행되었던 폭력의 형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있던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와 현재에도 다른 형태로 자행될 수 있는 국가 폭력에 대한 경계를 포함하는 민주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과거의 단순한 영웅주의의 역사관을 지양하여 특정 인물들의 개인적인 일대기를 그리는 전시와 추모에서 벗어나 역사를 관통하는 시간의 축 안에 얽혀있는 수많은 개인들의 소중하고 다양한 기억들을 담아내야 하며 건축가나 고문기술사 같은 도구적 인간, 사유하지 않음에 대한 경계를 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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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공원 부지는 1882년 청나라 군대를 시작으로 일본군 미군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 외국 군대가 주둔한 상설기지였다.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 자연적 문화적 단절이 일어난 공간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부지와 맞닿아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용산 기지들과 같이 단절되어 있었지만 이런 변화의 흐름에 맞물려 굳게 닫혀있던 경계를 허물고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가 평화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과거 대공분실 미래 민주 인권 기념관이 상징해야 하고 담아내야 하는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재료와 공간을 추가하여 경계를 허물어 삶의 터전과 맞닿아 있던 고문과 인권유린의 공간이 가지고 있던 아이러니와 이질감을 사라지게 하고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수공간이나 야외 추상 조각 공원, 조경공간 즉 전이공간을 프로그램과 병치하여 다양한 정보들과 사건을 곱씹을 수 있게 관람자 스스로 사유할 수 있고 내재화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주었고 기존의 대공분실 건물이 가지고 있던 폐쇄성을 극복하고 시각적 청각적 연결과 함께 프로그램의 연속성을 주기 위해 보이드 공간을 만들어 건물 자체의 유기적인 연결과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수직적인 공간이나 요소들을 적절하게 수평적으로 치환하여 높이로 나타나는 권위와 위압감을 없애고 화해와 치유 그리고 개인적인 사유의 공간으로 표현 하였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 건축적 요소인 5층의 조사실이나 원형계단 등과 같은 곳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여 그 가치를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철거
가장 중요한 공간인 5층 조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햇빛을 조사실로 유입하기 위해 철거를 활용했다. 높이를 낮춤으로 건물의 위압감을 줄이고 철거를 통해 나온 기존의 벽돌을 활용하여 앞마당에 전이 수공간을 만들었다.
관입
적은 개구부와 벽돌재료의 특성을 고려해서 경계를 허물고 접근성과 프로그램간의 유기성을 위해 유리매스를 관입하여 디자인했다.
연결
유리 매스를 통해 확장된 공간들의 동선을 서로 연결시켜 프로그램 내부의 유기성을 강조하였고 상층부 철거에서 나온 기존 벽돌들을 사용해 전이공간인 수공간을 디자인하여 추모동으로의 동선도 유도하였다.
재사용
수직적 요소로 기존의 대공분실의 경계를 구분 지었던 담장을 수평적인 요소로 치환하여 추모 조각 공원을 디자인했다. 가까이 가기도 힘들었던 권위주의와 공권력의 상징은 바닥에 박혀 시민들이 그 위에서 추모와 사색을 할 수 있는 공간의 오브제로 거듭났다.